단절된 이야기의 목격담

#0
아랫글은 서울에서 살기 시작한 지 2년 만에 본격 서울 탐방을 한 후 쓴 글로,
2014년 2월경 참가한 글쓰기 워크숍의 결과물이다.

(여기 올릴 줄 꿈에도 몰랐는데 … 암튼 그래서 ‘진짜공간’ 다른 글들과 달리 글이 좀 딱딱한 편인데, 양해 바란다.)

 

#1
얼마 전 발견한 한 장의 사진. ‘1968년 여의도 윤중제 공사 현장’이라는 알듯 모를듯한 주석이 붙어있는 이 사진에는 ‘서울은 싸우면서 건설한다’고 적힌 팻말이 꼿꼿이 서 있었다. 아득히 이어진 길. 저 뒤쪽에 두 사내가 걸어가는 뒷모습이 그다음으로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잘 다듬어진 흙바닥 길이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역동적으로 잡혀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큰 공사가 이제 막 시작된 곳인듯했다.

 

처음 이 사진을 보고는 그때도 철거민이 있었나 싶었다. 그래서 무슨 사연인지 궁금해 같은 문구를 인터넷에 두들겨 보니 같은 년도 1월 1일, 박정희가 친필로 쓴 ‘싸우며 건설하자’가 제일 먼저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제야 비로소 ‘서울은’이 작게 쓰여 있다는 것과 ‘싸우면서 건설한다’위에 있는 정부 로고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좀 더 들여다보니 한쪽 구석 강가엔 돌멩이만 한 인부들이 땀을 닦으며 한창 작업 중이었다. 그럼 ‘윤중제’는 무엇인가? 일어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은 것으로 실은 그냥 ‘섬둑’이라는 뜻이다. 그제야 그 길이 꽤 다이내믹하게 잡힌 이유가 이해되었다. 그리고 다시 그 푯말을 보니 그저 철거민들이 세워놓았다기엔 터무니없이 크고 반듯한 것이다. 다시 문구를 곱씹어 보니 완전히 다른 톤으로 읽혔다. ‘대한 늬우스’의 한 장면이라 해도 손색이 없어 보이는 것이다. 같은 말이 이렇게 다르게 읽힐 수 있다니! 새삼 껑충 뛴 시간이 실감 났다.

 

"여의도 윤중제 공사현장(1968. 05. 31)", 서울역사박물관, 2013, 서울시정사진기록총서 - 돌격 건설! 김현옥 시장의 서울.
“여의도 윤중제 공사현장(1968. 05. 31)”, 서울역사박물관, 2013, 서울시정사진기록총서 – 돌격 건설! 김현옥 시장의 서울.

 

격변하는 세월에 놀라는 것은 어쩌면 그다지 새삼스러울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사진이 찍혔던 60~70년대를 산 사람들에게 세월은 바로 그 눈앞에서 지겹게 격변하여 왔기 때문이다. 그 변화의 시발점인 1970년대 초, 아파트를 처음 보고 세상이 변하는 것을 새삼 목격하는 이의 감회는 내가 느낀 놀라움과 닮은 구석이 많다.

 


“처음 이 아파트촌을 먼발치에서 보고는 무슨 공장들이 저렇게 한 군데에 빽빽이 몰려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공장이라 하더라도 그 숫자가 너무 많았고, 지나치게 깨끗했다. 그럼 학교일까? 학교라면 무슨 학교가 잇대어 있지 않고 토막토막 떨어져 있단 말인가. 그리고 역시 그 건물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창고? 그 많은 서울 사람들이 먹고 사는 쌀을 넣어두는 창고? 그러나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이 사는 ‘아파트’라는 이름의 집인 것을 알고 그만 깜짝 놀랐던 것이다. 1, 2층도 아닌 5층이나 6층의 높은 건물에 층층이 사람이 산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살림을 하고 산다는 것이었다. 머리 위에서 불을 때고 그 머리 위에서 또 불을 때고, 오줌똥을 싸고, 그 아래에서 밥을 먹고, 그러면서 자식을 키우고 또 자식을 낳고, 사람이 사람 위에 포개지고 그 위에 또 얹혀서 살림을 하고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딸은 몰라도 아들을 키우는 데는, 서는 경우 머리 위에 걸리는 것은 대들보요 눕는 경우에 맞닿는 것은 벽뿐이어야 했다. 그래야 사내가 크게 되고 이름높은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아들을 뉘어놓고 에미라 한들 어디 감히 머리 위를 지나칠 수 있단 말인가. 어찌됐건 서울사람이란 보배운 데 없고 징상스러운 인종들이라 싶었다. 그런데 더욱 놀란 것은 그 아파트라는 집이 상상할 수조차 없도록 비싼 것이었다.” (조정래, <비탈진 음지>, [조정래 문학전집 4], 해냄출판사, 1999년 6월, 112~113쪽 – 실은 책을 읽은 것은 아니고 여기에서 본 글이다. 다른 글들도 다 너무 재미있다. 박철수교수님 화이팅.)


 

 

이 인물은 지금 70이나 80대 노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 노인은 아파트에서 나고 아파트에서 자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손주들을 보면 어떤 감회가 들까? 더는 놀랄 것도 없을까? 아니면 손주가 ‘보배운데 없고 징상스러워’ 애꿎은 호통이라도 칠까? 어쨌든 놀라울 만치 껑충껑충 내달리는 시간이기에 그 가랑이 사이만큼 사람들 생각과 이야기도 뚝뚝 끊기고 휙휙 바뀌기 마련인가 보다. 나와 저 이야기 속 사내는 많은 것을 다르게 보고 자랐다. 저 글에서 나는 내가 느낀 놀라움의 감정이 그와 닮아있다고 느꼈지만, 또 어떻게 보면 우리가 공유하는 감정은 놀랍다는 그것 하나뿐이다. 그게 뭐 그리 이상한 일이겠느냐마는 이는 못내 아쉬운 일이다.

 

 

#2
2008년 밀라노에 교환학생으로 갔을 적의 이야기이다. 내가 그곳에서 첫째로 놀랐던 것은 디자인과 학생들이 전부 1학년 때 수학을 필수과목으로 듣는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로 놀랐던 것이 그 수업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투시법과 원근법을 바탕으로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었다. 후에 근처 교회에서 ‘마지막 만찬’을 실제로 마주하자 500년 전 그 사람의 존재가 내 눈에 똑똑히 보였다. 어떤 굳건한 뿌리 같은 것. 그런 안정감과 확신이 드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나는 한글을 읽고 써도 훈민정음 원문은 읽을 수 없고 세종대왕의 동상이 내 앞을 가로막아도 나는 그가 정말 존재했던 사람인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600년 세월 탓을 하자니 ‘마지막 만찬’이 생각난다. 아마도 내가 집현전을 못 가보고 경복궁을 못 가봐서 일까 봐 해설사까지 졸졸 따라다니며 궁 구경도 했건만, 궁은 텅텅 비어 있고 조금만 눈을 돌려도 반짝이는 유리빌딩들이 산보다 더 가까웠다. 또 해설사가 여기가 사도세자가 죽은 곳이오 하면 <이산>에서 이창훈이 생각나고, 그래서 여기가 드라마 세트장인가 싶다가 디즈니랜드에서 진짜 앨리스 같던 앨리스를 본 기억이 났다. 그러고 보니 경복궁은 이상하게 드라마 속 웅장한 건물과는 다르다. 애써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모습을 머릿속으로 실물레이션을 해보아도 아무래도 내가 보고 있는 건 그냥 돌 바닥인 것이다. 그 모든 이야기가 할머니가 해주는 옛날 옛적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아무래도 그 증거를 쉽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동대문 앞 풍경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은 아마 이러한 맥락에서 일어난 일일 것이다.

 

 

#3
동대문에서 낙산공원 쪽으로 가는 길은 작은 동산같이 꾸며져 있는데, 그 위에 동대문 교회가 있다. 교회는 파란 천으로 둘러쳐져 있고 그 동산 아래 둥근 화단은 커다란 현수막과 푯말들이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실은 예전에 택시기사 아저씨가 뭐라고 뭐라고 욕한 데긴 한데 평소 큰 관심은 두지 않는 곳이었다.

 

그날 나는 친구들과 도성 투어 중이었고 낙산공원에서 시작해 동대문으로 이동 중이었다. 우리를 인솔하던 종로구청 소속 안내인은 600년 역사의 한양도성을 2015년에는 유네스코에 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것이 목표라고 운을 뗀 뒤 성곽의 흐름을 막고 있는 동대문교회를 헐고 성곽을 복원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덧붙여 2008년 법적으로 모두 해결이 된 동대문 교회 철거를 기독교인들이 갑자기 저런다고 말하며 푯말들을 가리켰다. 사납게 서 있는 푯말들처럼 그곳의 분위기는 싸늘했다. 설명하는 안내인 뒤, 기독교인들이 모여있는 천막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쪽의 사람들이 우리를 계속 노려보고 있었다고 한다. 푯말들은 126년의 역사, 헐버트 선교사의 역사를 보존하라 외치고 있었다. 한마디로 ‘싸우며 복원하는’ 현장.

 

동대문+로고

 

그러고 보니 택시기사도 저런 교회 따위가 성곽의 흐름을 끊어 놓는다며 욕을 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땐 ‘아이고 그렇습니까’ 하고 성의 없이 동의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껏 신나게 관광을 하며 돌아다녔더니 오히려 그런 생각도 드는 것이다. 단순히 600년과 126년을 숫자로 비교할 수 있을까? 차라리 근 126년의 동대문교회의 기억이 요즘 사람들에게는 더 시급히 이어야 할 잊힌 기억이 아닐까? 600년 전의 성곽을 복원하는 것은 기억의 끈을 잇는 것인가, 드라마 세트장의 확장공사인가?

 

 

#4
그런가 하면 반대로 아현고가도로는 축제 분위기 속에서 철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아현고가도로는 우연하게도 내가 보았던 사진과 같은 시기에 지어진 우리나라 첫 고가 도로라고 한다. 산업화와 거대 도시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 싸우며 건설한 이들은 이 도로를 통해 강성한 국가의 토대를 보았을 것이다. (혹은 불어나는 통장 잔액를 보며 흐뭇해했을지도 – 관련 링크)

 

그리고 지난 2월 8일. 자동차들만 오갔던 이 도로 위를 사람들이 걸으며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고 추억을 남기는 행사를 했다. 어찌 보면 자동차들이 그 위를 오고 가며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고 해야 할 것 같은데…. 뭐 어찌 되었건 그 사람들의 인터뷰 내용도 재미있었다. 아쉽다는 것이다. 그 기사를 보는 기분도 금세 동했다. 버스를 타고 몇 번인가 오고 가며 보았던 풍경들이 떠오르는 것이다. 보면서 태국에 여행 갔을 적 보았던 것들을 생각했는데, 이제 그 풍경을 못 본다고 생각하니 왠지 기분이 묘하게 아쉬웠다. 묘했다. 아름다운 건축물도 아니고 나에게 의미 있는 건축물도 아니다. 내 추억의 장소도 아니다. 그저 짧은 기억의 장소가 사라진다는 것이 아쉬운 것이다. 못났건 잘났건, 편하건 불편하건 어찌 되었건 공간이라는 곳은 사람이 부대끼며 기억이 쌓이고 추억이 남는 곳인가 싶다. 흉물스럽고 유지비가 비싸다며 철거하는 고가도로에 굳이 가서, 평소에 걷지 않았음에도 굳이 걷고 그림을 그리고 하는 것이 별나 보이지만 또 그것이 어쨌든 그 서사를 잘 마무리한 듯한 인상도 준다. 그간 그곳에서 함께 살아온 기억에 마침표를 찍는 것이다. 또 없어진 자리에 새로운 무언가가 세워지는 대신, 길을 이어 버스 전용도로를 만든다고 한다. 고가도로 일부는 역사박물관에 전시될 것이다. 아현고가도로는 다른 형태로 기억될 것이다. 이것은 ‘싸우며 건설’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선언으로도 보이는 것이다.

 

박정호 기자, 2014, [화보] ‘공중(空中) 놀이터’로 변신한 아현고가도로, 뉴스1, 2014.02.08, http://news1.kr/articles/1530729

 

#5
얼마 전 버스를 타고 가다가 아현고가도로 철거 현장을 스쳐 지나갔다.
아스팔트를 벗기니 흙이 나온 것이 신기했다.

뭐 다시 아스팔트로 덮겠지만.

 

 

 

 

 

글쓴이. 신인아

오빠들과 더 가까이서 숨 쉬고 싶어 서울에 사는 게 꿈이었던 충북지역 club H.O.T. 시절을 지나 드디어 서울에 사는, 서울 구경하는 게 제일 재미있는 서울 빠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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