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과 원칙들이 가상이 되어 실제와 분리되어있다.

FRANÇOIS ASCHER

‘도시의 새로운 원칙들’에 대한 수업을 마치고.
동네예술가 팀원 중 한 명이 아이들과의 벽화작업 과정을 이야기 해주었다. 작년에 그렸던 쥐구멍이 그려진 벽 앞에서 ‘여기에 뭘 그리면 좋을까?’ 물었더니 모두들 ‘치즈요~’라고 외쳤단다. 황당하게도 이 나라에는 쥐가 먹을 치즈가 없다. 그 이미지는 어디서 얻어냈을까? 그 많은 아이들의 외침이 ‘치즈’라고 통일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어떻게 이 아이들의 기억에 그토록 깊이 남아있을 수 있을까? 앞으로 쥐들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치즈의 양이 많아지면 모를까 그 아이들이 커서도 그리 생각한다면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출산을 앞둔 친구의 꿈에 노랑머리 백인 아이들이 뛰놀았다던 이야기를 들었다. 공익광고를 포함한 대부분의 매체가 그렇듯이 어떤 축제에 백인들이 몇 명 있으면 카메라는 계속 그들을 쫓아다닌다. 그러다 어느 날 거울에 비친 우리의 얼굴이 금발의 백인으로 보이는 일이 생기는 건 아닐지. 또 모를 일이다.

.

지구는 서양중심역사로 돌아가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의 문화를 알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교류라는 것도 내가 걸음마 정도는 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 같이 걷든 뛰든 할 것 아닌가. 대한민국 서울이라는 현실을 딛고 선 체 ‘유럽식 고품격’이라는 가상공간에 갇혀사는 정서의 괴리는 일상 뿐 아니라 학문에서도 조장된다. 나와 도시 ‘파리’가 도체 무슨 상관이길래 한두번도 아니고 끊임없이 들어야 되는 걸까?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파리의 낭만은 완벽하게 설명하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 대해선 간단하게 혼란으로 이야기 한다.

.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유학의 길을 걷고 들어와 수십년간 학교를 지배하고 있다. 그렇게 좋은 것을 배우고 들어왔으면 학교라도 좋아져야 할텐데 현실은 회의적이다. 그들이 오랫동안 수혈한 서구의 문화에서 우리는 무엇을 건졌을까? 그래서 결국 유학을 가야한다는 결론, 학문 전반에 걸쳐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현상들. 현재의 나는 어디로 사라져버린 걸까. 유학이라는 경력 한 줄이 나를 찾아 줄 수 있을까? (서구문명 안에 들어가면 나를 찾을 수 있을까, 그때서야 사람들은 내 존재를 인정해줄까?)

.

이것을 굳이 새로운 원칙이라고 내놓은 이 사람의 정체가 뭘까 정말 궁금했다. 왜 이걸 공부해야하는 지도 궁금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자료도 찾기 쉽지 않았다. 책을 찾아보니 2001년 말에 출판되었다. 그쯤이면 이미 떠도는 이야기들을 꿰어 정리 했을 것이고, 2009년 현재 그가 내 놓은 원칙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논리정연하게 설명할 수 없더라도 개념적으로는 알고 있을 것이다.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를 떠나 이런 원칙들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면 상해가는 고인 물 속에 앉아 사람일 것이다. 심지어 진부하기까지 하니 말이다.

.
그가 2001년에 엮은 책을 나쁘다고 평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엮은 책을 2009년에 우리가 어떻게 이용하느냐의 문제다. 원칙을 알기 위해 필요한 배경도 읽었고, 원칙도 이해했다. 상당히 많은 부분들이 우리 삶에 이미 적용되어 진행되고 있는 부분들이다. 정확한 용어의 정의를 말할 수 있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 용어가 내 삶의 어느 부분인지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아셰르’가 말하는 ‘하이퍼스페이스’를 여러 개념적 언어들로 설명할 수는 있으나 나의 일상에 존재하는 ‘하이퍼스페이스’를 찾을 수 없다면 이해한 것이 아니라 읊었을 뿐인 것이다. 이번 수업을 통해 자신이 살고 있는 실재에 대해 생각하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에게 책과 생활의 간극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심했다.

.

우리는 ‘아셰르’의 글을 이해하고 설명하는데도 힘겨워했다. 포드주의, 하이퍼텍스트, 메타폴리스…라는 외래어의 권위에 눌려있었던 것은 아닐까? 외국학자의 이름과 그들의 이론을 외래어로 인용하면서 생소한 단어들의 나열로 자신의 학문적 권위를 표하는 사람들의 글을 보자면, 한 페이지 넘기는데 종일 걸리는 일이 간혹 있다. 이해하면 별것도 아닌 개념인데, 어려워하고 어렵게 설명한다.
.

이론과 원칙들이 가상이 되어 실제와 분리되어있다. 소화되지 않은 이론들과 관찰되지 않은 실재들이 둥둥 떠다닌다. 위대하다고 칭송되는 이론과 원칙들은 산재해 있고, 선험적 사례들도 찾을 수 있다. 중요한 건 그것들을 현재 여기에, 적재적소에 적용하는 것이다. 나무가 좋다는 것은 알지만, 그 장소에 어떤 나무를 어떻게 심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하는 것처럼 이 곳의 현재를 파악하는 일도 중요하고, 어떻게 적용해야 할 지 많은 시간을 고민해야한다. 이 역시 말하기에도 지루한 원칙임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다. 뻔히 알면서도 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은데 그 중 하나다.

.

권위적인 책을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데 비해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상황을 관찰하고 고민하는 시간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 같다. 그러니 연결이 쉽지 않은 것이다.

.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잘 모르겠다는 말이 나온다.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은 어느 하나의 문제만이 아닐테니까. 하나의 사고가 일어나려면 150여 가지가 넘는 조건이 맞아야 일어난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하나만의 문제는 아닐테지만, 하나씩 좁혀나가는 수 밖에.

This work is licensed under a Creative Commons Attribution-NonCommercial-ShareAlike 4.0 International License.

Leave a Reply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

%d bloggers like th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