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안의 신 : 문신門神과 처용설화

수문신(守門神)이라고도 한다.

집지킴이 신들은 오로지 자신의 전선만을 지킬 만큼 고지식했고 순진했다. 그들이 상대한 잡귀들도 그러기는 매한가지. 잡귀들은 병문안을 다녀온 신발에, 궂긴 소식을 담은 부고(訃告)에 들러 붙어왔을 만큼 악착스러운 한편 꽤나 어수룩했다. 아무리 영악한 잡귀라도 월담을 몰랐다. 그래서 문 지킴이는 문만 잘 지키면 그만이었다. (한 지붕 아래서 신들과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 전라도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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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의 신체는 용과 호랑이다. 용이나 호랑이가 그려진 그림과 글자가 대문을 지키고 또다시 호랑이 뼈, 게, 엄나무 등을 메달아 문을 지켰다.

    

엄나무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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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뼈, 운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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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문신이 가택신의 하나로 존재하고 오래 전부터 서울 민속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었다는 점은 한국의 다른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성인 것 같다. 농촌의 마을 사회에서는 몇몇의 특수한 부유층 양반들의 대저택을 제외하고는 가옥에서 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적고 정교한 대문을 가진 예는 극히 찾아보기 힘들다. 그 대신에 도시사회에서는 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극히 정교한 대문을 가지고 있어서 문간출입을 담당하는 수문신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우리의 풍속에서 문신상은 이미 신라시대부터 분명한 기록을 보이고 있다. 《삼국유사》에  보이는 처용랑이다. 그러니까 신라시대에는 이미 처용의 모습을 수문신으로 문에 그려 붙이는 풍습이 있었다.

그리고 ‘글로서 그림을 대신한 것’은 미화 변형되어서 立春大吉이니笑門萬福來로 지금도 새해에는 문전에 붙여서 유구한 수문신 관념의 변화와 전통을 지금껏 도회지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동지에 팥죽을 쑤어 대문 앞에 뿌림으로써 잡귀를 막는 풍속이 전해진다.

무형문화유산 아카이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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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http://uporter.sbs.co.kr/nsNews/goSectionView.action?newsId=48483

입춘대길(立春大吉:입춘이 되니 크게 길할 것이요)

건양다경(建陽多慶:따스한 기운이 도니 경사가 많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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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이나 마을입구에 세워지는 입석등은 마을 전체의 수문신 역할을 담당하였다. 해안 지역에서는 집안으로 드나드는 대문에 특별하게 작은 바위를 배치하여 문을 지키게 하였다. 무속신앙에서는 제주도에서만 특별히 문신을 모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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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處容)설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처용랑 망해사(處容郞望海寺)

나라가 태평을 누리자 왕이 879년(헌강왕 5)에 개운포(開雲浦:지금의 울산) 바닷가로 놀이를 나갔는데, 돌아오는 길에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덮이면서 갑자기 천지가 어두워졌다. 갑작스런 변괴에 왕이 놀라 좌중에 물어보니 일관(日官)이 말하되 “이것은 동해 용의 짓이므로 좋은 일을 행하여 풀어야 합니다”고 하였다. 왕이 용을 위하여 망해사(望海寺), 절을 짓도록 명한 즉, 바로 어두운 구름은 걷히고(이로부터 이 곳을 開雲浦라 하였다), 동해 용이 일곱 아들을 데리고 나와 춤을 추었으며 그 중 하나가 왕을 따라오니, 곧 그가 처용이었다. 왕을 따라온 처용은 달밤이면 거리에 나와 가무(歌舞)를 하였다 하며 왕은 그를 미녀와 짝지어주고 급간(級干) 벼슬을 주었다. 이 아름다운 처용의 아내를 역신(疫神)이 사랑하여 범하려 하므로 처용이 노래를 지어 부르며 춤을 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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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밝은 달에 / 밤들이 노닐다가 / 들어가 자리 보곤 / 다리가 넷이어라 / 둘은 내 것이고 / 둘은 뉘 것인고 / 본디 내 것이지만 / 앗은 걸 어찌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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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신이 감격하여 모습을 나타내어 무릎꿇고 빌며 처용이 있는 곳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겠다는 약조를 하고 사라진다고 한다. 그 후부터 백성들은 처용의 형상을 그려 문간에 붙여 귀신을 물리치고 경사가 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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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신라통일전쟁과 8세기의 활발한 무역은 동아시아 각 지역의 풍토병을 교환하는 계기가 되었고, 9세기 처용의 시대에는 천연두의 공포가 대단했던 시기다.

‘천연두’는 자연스럽게 상처가 생긴다는 뜻, 인간이 어찌할 수 없다는 뜻이 내포되어있다. ‘역신’ 역시 전염병을 퍼뜨리는 인간이 넘지 못하는 존재, 신격화한 것이다. 이 신을 잘 대접하여 감복시켜 돌려보내는 것이 처용이 하던 일이다.

처용이 역신을 물리친 춤과 노래의 힘은 우리 문화 속에 생생히 남아 있다.  유교국 조선에서도 궁중의 나례(儺禮), 즉 귀신 쫓는 의식에서 처용무(處容舞)는 가장 중요한 춤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불과 몇십년 전만 해도 천연두는 인류가 가장 두려워했던 병이었고, 현재도 사스나 신종플루 같은 전염병은 공포스런 병이다.

처용 탈

관리들이 쓰는 관을 쓰고, 귀신이 싫어하는 모란꽃을 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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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화랑이 맡았던 국가차원의 주술적 역할은 고려시대에는 지역화했고, 지금도 세습무의 집안 역사 속에서 자신들을 화랭이 지칭하는 것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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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무형문화유산 아카이브즈 http://www.koreaich.org/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grandculture.net/

한국민속대백과사전 http://folkency.nfm.go.kr/

 

KBS 역사스페셜

네이버백과사전

http://blog.naver.com/ckh1640?Redirect=Log&logNo=1009728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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